책을 읽다 말고 창밖만 보는 분이 있었어요. 몇 번을 와도 같은 페이지에 머물러 있길래 알았죠. 눈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어딘가 지난 자리에 가 있는 거예요. 저도 그런 밤을 압니다.
잊고 싶은데 자꾸 떠오르는 일. 그럴수록 "왜 나는 이걸 못 놓을까" 하고 자신을 탓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잊지 못하는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한 철학자가 흥미로운 말을 했어요. 잊는 능력은 결핍이 아니라 적극적인 힘이라고요. 우리는 기억을 쌓는 것만 능력이라 여기지만, 필요할 때 문을 닫아 두는 것도 그만한 힘이 든다는 거죠.
그런데 그 문을 억지로 밀어 닫으려 하면 오히려 안 닫힙니다. "생각하지 말자"는 그 자체가 이미 그걸 생각하는 일이니까요. 밀어낼수록 더 선명해지더군요. 지난 일이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쩌면 아직 그 문을 닫을 힘이 채 돌아오지 않은 것뿐이에요.
망각 없이는 어떤 행복도, 어떤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잊을 줄 아는 자만이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이 말을 이렇게 읽었어요. 잊는다는 건 기억을 지워 없애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지금의 나를 흔들지 않는 자리로 옮겨두는 일이라고요. 사건은 남아 있어도, 그게 나를 쥐고 흔드는 힘은 줄어드는 거죠.
저는 잊으려 애쓰는 대신,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잠깐 두게 됐어요. 밀어내지 않으니 이상하게 머무는 시간이 짧아지더군요. 손님이 왔다 가듯, 왔다가 다시 나가게 두는 거죠.
지난 일이 자꾸 떠오른다면, 그걸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잊음은 시간이 우리 안에서 조용히 해주는 일이니까요. 다만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기억에 묶여 멈춰 있기보다 오늘 하루를 새로 시작하는 쪽을 내가 택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