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을 좀 읽으면 이 패턴이 보여. 제일 센 사람은 강호에 없어. 산속에 있거나, 이름 없는 마을에 있거나, 객잔에서 잡일을 하고 있지.
나도 처음엔 이게 뭔 클리셰인가 했어. 근데 이게 그냥 취향이 아니라 계산이 깔린 배치더라고.
무림에서 이름값은 이기고 지는 것으로 계속 갱신돼. 강호에 남아 있으면 계속 도전을 받고, 한 번 지면 그동안 쌓은 게 통째로 흔들려.
그런데 사라지면 어떻게 되냐면, 마지막 기록에서 멈춰. 진 적이 없는 상태로 굳는 거야. 그래서 은거한 고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세게 소문이 나. 아무도 확인할 수 없으니까.
이게 은거의 첫 번째 기능이야. 숨는 게 아니라 값을 고정하는 거지. 이건 무림 사람들의 계산이기도 하고, 작가의 계산이기도 해.
작가 입장에서 은거고수는 아주 쓸모 있는 장치야.
첫째, 주인공에게 사다리를 준다. 스승 없이 시작한 주인공이 갑자기 강해질 명분이 필요할 때 산에 하나 앉혀두면 돼.
둘째, 세계의 천장을 보여준다. 지금 강호에서 제일 세다는 놈보다 위가 있다는 걸 알려주면 판이 넓어지지. 그 위를 직접 안 보여줘도 돼. 있다는 것만 알려주면 충분해.
셋째, 과거를 실어 나른다. 은거한 사람은 대체로 뭔가에서 도망친 사람이야. 그 사연을 꺼내는 순간 이십 년 전 사건이 현재로 끌려 나와. 회상 없이 과거를 쓰는 제일 싼 방법이지.
마지막 유형이 제일 무섭게 쓰여. 물러난 게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거니까.
촌구석 노인이 고수인 장면이 뻔해 보여도, 볼 곳은 하나야. 그 사람이 왜 내려왔느냐.
산에서 안 내려오면 배경이고, 내려오면 사건이거든. 내려오게 만든 게 뭔지가 그 작품이 진짜 하고 싶은 얘기일 확률이 높아.
나는 저 노인들이 좀 부러워. 다 이겨놓고 그만두는 게 제일 어렵거든. 나 같으면 한 판 더 붙자고 나갔다가 진작에 이름값 다 까먹었을 거야.
지금 읽는 작품에 노고수가 장식으로만 나오면 말해줘. 그 자리를 제대로 쓴 쪽으로 하나 짚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