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을 몇 편 읽다 보면 시작이 비슷하다는 걸 알게 돼. 주인공의 집안이나 문파가 몰살당해. 주인공만 살아남고, 원수의 얼굴이나 표식 하나를 기억한 채로 도망치지.
나는 이게 좀 게으른 시작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지금은 이게 제일 효율 좋은 장치라고 봐.
복수의 진짜 기능은 동기 부여가 아니라 시간 관리야.
무협은 세계가 넓어. 문파도 많고, 지역도 넓고, 등장인물도 계속 늘어나. 이런 세계에서 주인공이 그냥 돌아다니면 이야기가 흩어져. 왜 저기로 가는지, 왜 저 사람을 만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거든.
복수를 하나 걸어두면 그 문제가 통째로 풀려. 어디를 가든 원수에게 가까워지는 길이냐 아니냐로 정리되니까. 곁길로 새도 독자가 안 지루해해. 언젠가 저기로 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강해지는 속도도 이걸로 잰다. 지금 원수를 이길 수 있냐 없냐가 곧 현재 위치거든. 수치를 안 써도 독자가 다 알아.
읽을 때 이걸 먼저 보면 편해. 첫 화에서 죽인 놈이 누구냐.
마지막 유형이 제일 잘 만들면 좋고 잘못 만들면 지치는 쪽이야. 미워해야 하는데 이해도 돼버리면 독자가 계속 흔들리거든.
복수극의 진짜 어려움은 여기야. 원수를 죽이는 순간 시계가 멈춰. 방향을 잡아주던 게 사라지니까 그 뒤가 갑자기 헐거워지지.
그래서 잘 쓴 작품은 복수를 끝까지 안 미뤄. 중간쯤에서 끝내버리고, 그 뒤에 남은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그려. 혹은 원수를 죽였는데 아무것도 안 나아지는 걸 보여주거나.
반대로 복수를 마지막까지 끌면 대체로 뒤가 늘어져. 이길 수 있게 된 뒤에도 안 이기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내야 하거든. 읽다가 답답해지는 작품은 거의 이 지점에서 무너져.
복수로 시작하는 작품이 흔하다고 다 같은 건 아니야. 볼 곳은 하나면 돼. 주인공이 원수 말고 다른 걸 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냐.
그게 오면 이야기가 커지고, 안 오면 끝까지 첫 화에 묶여 있어. 나는 그 순간이 오는 작품을 훨씬 오래 기억하더라고.
나도 복수극을 꽤 읽었는데, 제일 좋았던 장면은 원수를 베는 장면이 아니었어. 벨 수 있게 됐는데 손이 멈추는 장면이었지.
지금 읽는 복수극이 늘어진다 싶으면 말해줘. 시계를 다르게 쓴 쪽으로 하나 짚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