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기록을 정리하다가 재미있는 걸 봤어요. 같은 책을 세 번 빌린 분이 있었는데, 세 번 다 반납일이 빨랐습니다. 끝까지 못 갔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분은 네 번째로 또 그 책을 찾으셨어요.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쌓이면 우리는 대체로 자신을 탓하더군요. 의지가 없다고요. 그런데 저는 그 더미를 조금 다르게 봅니다.
책장에 꽂힌 안 읽은 책은 하나하나가 내가 관심을 가졌던 방향의 기록이에요. 그날 서점에서 그 책 앞에 멈춰 섰다는 건, 그때 내 안에 그 질문이 있었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니 그 더미는 게으름의 증거가 아니라 관심사의 지도에 가깝더군요.
지도는 다 밟지 않아도 값을 합니다. 어디에 가고 싶었는지를 알려주니까요. 몇 년 뒤에 그 책들을 다시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가 줄지어 보일 겁니다.
문제는 책이 아니라 부채감입니다. 사는 순간 우리는 그 책을 다 읽겠다는 약속을 자신과 맺어버리거든요. 그리고 그 약속을 안 지킨 목록이 눈앞에 쌓여 있으니 매일 조금씩 지는 기분이 드는 거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셈하지 말고, 그중 하나를 오늘 지켜라.
이 문장을 책상 앞에 붙여둔 적이 있어요. 셈하는 사람은 무거워지고, 하나를 고르는 사람은 가벼워진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규칙을 오래전에 놓았어요. 필요한 장만 읽고 덮은 책도 읽은 책으로 셉니다. 그렇게 세니까 더미가 줄더군요. 실제로 줄어든 건 아닌데, 무게가 줄었어요.
한 권을 골라 목차만 보고 필요한 한 장을 읽는 데는 삼십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 삼십 분이 쌓이면 더미는 짐이 아니라 창고가 되죠.
안 읽은 책이 쌓여 마음이 무겁다면, 더미 전체를 해치우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손에 잡히는 한 권을 뽑아 필요한 한 장만 읽어보세요.
더미는 내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의 목록이더군요. 그 목록을 죄책감으로 남겨둘지 재료로 쓸지는, 오늘 한 권을 뽑는 손이 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