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뉴스를 보다가 리모컨으로 탁자를 두 번 치고 채널을 돌리던 가족이 있었습니다. 화면이 바뀌자 십 초 만에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그 십 초를 봤습니다. 십 초 만에 꺼지는 건 분노가 아닙니다.
분노였다면 채널을 돌려도 안 꺼집니다. 대상이 화면 안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날 그 자리에 있던 건 짜증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짜증을 작은 분노라고 여기십니다. 큰 화면 분노, 작은 화면 짜증. 그게 아닙니다. 둘은 크기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감정입니다.
분노에는 넘어진 선이 있습니다. 내 것이 침해됐거나, 지켜져야 할 것이 안 지켜졌습니다. 대상이 분명하고, 요구할 내용이 있습니다.
짜증에는 방해가 있습니다. 하려던 게 막혔거나, 감각이 계속 긁힙니다. 대상은 흐릿하고, 요구할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말이 되어 나오고 짜증은 소리로 나옵니다. 탁자를 치는 건 소리 쪽이지요.
지금 화가 난 그 일에 대해 상대에게 요구할 문장이 하나 있습니까?
여기서 문장이 안 나오는데도 계속 화가 난다면, 화의 대상이 그 일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대개는 이미 지쳐 있는 상태이고 그 일은 마지막에 얹힌 것뿐이겠지요.
짜증을 분노로 부르면 엉뚱한 사람에게 청구서가 갑니다. 요구할 내용이 없는데 화는 나 있으니 가까운 사람에게 나가고, 나간 뒤에는 남는 게 없습니다. 십 초 뒤에 꺼질 감정으로 관계를 긁는 겁니다.
반대로 분노를 짜증으로 부르면 넘어진 선이 그대로 남습니다. 내가 예민한 줄 알고 넘기니까요. 그런데 선은 안 세우면 다음에 또 넘어집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는 집이나 회사에는 대개 이 오해가 하나씩 있습니다.
바깥에서 들어온 소식에 화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같은 질문이 그대로 쓰입니다.
제가 본 것만 말씀드리면, 뉴스를 보며 나오는 화는 대개 요구할 상대가 없습니다. 상대가 없으니 문장이 안 만들어지고, 문장이 없으니 저녁 내내 남습니다. 넘어진 선이 있는데 세울 자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하나뿐입니다. 그것이 짜증인지 분노인지 정확히 부르는 것. 부르고 나면 최소한 그 화가 옆 사람에게로 새지는 않습니다.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화가 나셨다면 하나만 해보시죠. 요구할 문장이 하나 만들어지는지.
만들어지면 분노이고 안 만들어지면 짜증입니다.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