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사과 문자를 열 번 고쳐 쓰다가 결국 하나도 못 보냈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본인은 그걸 두고 자기가 뻔뻔해서 그렇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반대로 봤습니다. 보내지 못한 이유는 미안함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감정의 이름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붙들고 있던 건 죄책감이 아니었습니다. 수치심이었습니다.
죄책감은 내가 한 일을 향합니다.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자리에서 그렇게 굴지 말았어야 했다. 대상은 행동입니다.
수치심은 나라는 사람을 향합니다. 나는 원래 저런 인간이다, 나는 어디서든 이런다. 대상은 존재입니다.
같은 사건에서 둘이 함께 올라오니까 하나로 묶어 부르시는데, 묶는 순간 다룰 방법이 사라집니다.
행동은 고칠 수 있습니다. 사과할 수 있고, 갚을 수 있고, 다음에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책감은 반드시 할 일을 하나 만들어냅니다.
존재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잘못된 인간이라면 사과를 해도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수치심은 사람을 얼어붙게 만듭니다. 열 번 고쳐 쓰고도 못 보내는 건 그래서입니다. 보내는 순간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게 확정되는 것 같으니까요.
구분법은 단순합니다. 속으로 하는 말이 무엇으로 시작하는지 보시면 됩니다.
주어가 행동이면 앞쪽, 주어가 나면 뒤쪽입니다. 지금 무거운 그 마음은 어느 쪽입니까?
죄책감 쪽이면 할 일이 정해져 있습니다. 사과하거나, 갚거나, 다음에 다르게 하거나. 셋 중 하나이고 끝이 있습니다.
수치심 쪽이면 순서가 다릅니다. 사건을 사람 크기에서 행동 크기로 되돌려 적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를 "나는 그날 그 말을 했다"로 바꿔 적는 겁니다. 좋게 바꾸라는 뜻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적으라는 뜻입니다. 적어놓고 보면 사실은 대개 훨씬 작습니다.
이게 자기합리화가 아니냐고 물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닙니다. 합리화는 한 일을 줄이는 것이고, 지금 하는 건 한 일과 사람을 떼어놓는 것입니다. 한 일은 그대로 둡니다. 오히려 더 정확하게 적습니다. 떼어놓지 않으면 사과조차 못 하게 되고, 결국 아무것도 갚지 못한 채로 남지요.
열 번 고쳐 쓴 그 문자도 아마 뒤쪽이었겠지요.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미안한 마음이 무거우셨다면 한 문장만 적어보시죠. 주어가 "내가 한 일"인지, "나"인지.
구분이 되면 할 일이 갈립니다. 헷갈리시면 같이 세워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