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를 켜놓고 두 시간 동안 첫 줄만 썼다 지웠다 하셨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본인은 그걸 게을러서라고 하셨습니다.
두 시간을 화면 앞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게으르다는 말은 안 맞습니다. 앉아 있었다는 건 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쭈었습니다. 첫 줄에 뭘 써야 할지는 아십니까?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답답한 게 아니라 막막한 겁니다.
막막함은 갈 곳을 모를 때입니다. 방향이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안 정해졌으니 발이 안 떨어집니다.
답답함은 갈 곳을 아는데 안 움직일 때입니다. 방향은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이 막혀 있습니다. 말이 안 통하거나, 허락이 안 나거나, 조건이 안 맞습니다.
둘 다 앞이 안 나가는 느낌이라 한 단어로 부르시는데, 하나는 지도가 없는 것이고 하나는 길이 막힌 것입니다. 필요한 물건이 아예 다릅니다.
막막한데 답답함으로 부르면 계속 밀게 됩니다. 방향이 없는데 힘만 씁니다. 두 시간 동안 첫 줄을 썼다 지웠다 하는 게 정확히 이것입니다. 밀 곳이 없는데 밀고 있는 겁니다.
답답한데 막막함으로 부르면 계속 알아보게 됩니다. 이미 아는데 더 찾습니다. 자료를 더 모으고, 사례를 더 봅니다. 그런데 막힌 건 정보가 아니라 통로라서 아무리 모아도 안 뚫립니다.
둘 다 힘은 똑같이 드는데 아무 데도 안 닿습니다. 저녁에 완전히 지쳐 있으면서 진도는 하나도 안 나가 있는 날, 대개 이름이 틀린 날입니다.
지금 이 일에서 다음 한 칸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으십니까?
여기서 "다 알긴 아는데 딱 뭐부터인지는 모르겠다"는 답이 나오시면, 그건 앞쪽이 아니라 뒤쪽입니다. 다음 한 칸을 못 대면 방향이 없는 것이니까요.
막막함 쪽이면 필요한 건 범위를 좁히는 일입니다. 전체를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안에 대답할 수 있는 질문 하나로 줄이시면 됩니다. 이력서라면 "내가 지난 삼 년에 한 일 중 남한테 설명할 수 있는 것 세 개"처럼요. 방향은 대개 답에서 나오지 질문 전에는 안 보입니다.
답답함 쪽이면 필요한 건 막힌 지점을 지목하는 일입니다. 누구에게서 막혔는지, 어떤 조건에서 막혔는지를 한 줄로 적습니다. 적어놓고 보면 대개 사람 하나이거나 조건 하나입니다. 하나면 물어볼 수도 있고 우회할 수도 있겠지요.
필요한 게 지도인지 통로인지, 이것만 갈라도 저녁의 피로가 줄어듭니다.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진도가 안 나가셨다면 하나만 해보시죠. 다음 한 칸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지.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